[싱가포르=이데일리 김은경 기자] 싱가포르 시내 중심 금융가에서 자동차로 10분 남짓 동쪽으로 달리다 보면 그 끝을 한눈에 담기 어려운 거대한 해운 터미널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면적 576헥타르(ha)로 축구장 약 800개, 여의도 전체 면적의 약 2배에 달하는 이곳은 싱가포르 항만 운영사 PSA가 운영하는 파시르 판장(Pasir Panjang) 터미널이다.

지난 17일(현지시간) 세계 최대 환적항을 보유한 싱가포르의 파시르 판장 터미널을 찾았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무역로에 위치한 싱가포르는 지리적 이점으로 아시아의 물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연간 컨테이너 처리량은 2023년 기준 약 3700만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분)로 세계 환적량의 약 20%를 차지한다.
PSA 본사 건물 19층에서 내려다본 파시르 판장 터미널에는 해안가를 따라 길게 뻗은 야드에 성냥갑처럼 보이는 컨테이너가 빼곡히 야적돼 있었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와중에도 50m 높이의 크레인 약 140여기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선박에 쌓인 컨테이너를 들어 올려 야드로 내려보냈다.
정박한 중국 국영 선사 코스코의 배에는 반대로 컨테이너가 촘촘히 쌓아 올려지고 있었다. 야드에는 머스크, 에버그린, HMM 등 전 세계 선사들의 로고가 적힌 각양각색의 컨테이너 수십만 개가 쌓여 있어 거대한 ‘테트리스’ 게임판을 연상케 한다.
이곳 PSA 근무 인력은 하역 노동자 3000여명, 사무직 직원 500여명으로 터미널 규모에 비하면 많지 않은 수준이다. 야드 설비 대부분을 자동화한 덕분이다. 관제실 직원들이 전체 컨테이너 선적과 하역을 조율하고 무인 운반차(AGV)가 컨테이너를 이송한다. 하루 평균 컨테이너 처리량만 10만개에 달해 자동화를 통한 오차 없는 작업이 필수다.
각국의 컨테이너가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이곳 터미널은 365일, 24시간 쉼 없이 가동된다. 그럼에도 이날 터미널 주변은 미처 접안하지 못한 선박 수십 척이 해안가를 둘러싼 채 바다에 떠 있었다. 최근 미국과 중국의 관세 전쟁 휴전 이후 급격히 증가한 물량을 터미널이 모두 소화할 수 없었던 탓이다.
배가 하루 멈춰 있는데 드는 돈만 수억원, 선사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PSA 관계자는 “선박에 컨테이너를 쌓는 선적 작업에 약 1.5일이 걸린다”며 “바다에 떠 있는 배들은 아직 미처 들어오지 못한 것들”이라고 설명했다.

1974년 문을 연 파시르 판장은 지난 50여 년간 싱가포르 최대 터미널이자 세계 물류의 혈류(血流)로 자리매김해 왔으나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이 부지를 국가에 환원해 금융과 관광을 결합한 상업지구로 재개발을 추진 중이다. 국가 전체 면적이 서울보다 약 20% 클 정도로 작아 땅이 귀해 도시 안에 대규모 항만을 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파시르 판장을 포함해 탄종 파가르, 케펠, 브래니, 셈바왕, 주롱 등 총 6개의 터미널을 운영했으나 이를 2040년까지 서쪽 외곽의 ‘투아스(Tuas) 메가 터미널’로 일원화할 계획이다. 현재 파시르 판장과 브래니 터미널 일부를 가동하고 있으며 탄종 파가르와 케펠 터미널은 이미 문을 닫았다.

PSA는 2016년부터 설계와 시뮬레이션 작업을 거쳐 2021년 투아스 터미널 일부 구간 운영을 시작했다. 2040년 완공 시 연간 화물 처리 능력은 6500만TEU로 단일 항만 기준 세계 최대 규모로 올라서게 된다.
해운업계에선 투아스 완공 시 싱가포르가 중국을 뛰어넘는 해운 거점으로 부상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세계 1위는 중국 상하이항으로 2023년 기준 컨테이너 물동량 약 4900만TEU를 기록 중이다. 기존 싱가포르 파시르 판장 규모는 약 4300만TEU이며 부산항의 경우 약 2500만TEU 수준이다.
싱가포르는 투아스 터미널을 ‘완전 자동화 항만’으로 완성한다는 목표다. 자동 크레인과 자동 유도 차량(AGV)을 도입해 기존 도시 터미널에 비해 노동 생산성을 2배 이상 높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투아스 터미널은 손가락 형태로 길게 뻗은 4개 야드 구조를 통해 환적 흐름을 정밀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PSA는 투아스를 단순한 환적항만을 넘어 산업 생태계의 중심으로 꾸밀 계획이다.
투아스 일대를 ‘포트 플러스 허브(Port Plus Hub)’로 지정하고 맞춤형 창고와 냉장 시설, 위험물 저장시설 등을 구축한다. 전기·수소 트럭 기반 친환경 운송 수단도 도입한다. 인근 주롱 혁신지구와 연계한 복합 개발도 추진 중이다.
지속 가능한 터미널 운영을 위한 친환경 정책은 PSA의 핵심 전략 중 하나다. PSA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 50% 감축, 2050년까지 넷제로(Net Zero)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PSA 관계자는 “해운과 항만 산업 디지털 전환을 주도하고 공급망 탈탄소화를 통해 환적 허브의 친환경 가치를 실현할 것”이라며 “선박 연료 효율 개선과 태양광 등을 통한 전력 절약 활동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이 기사는 (재)바다의품과 (사)한국해양기자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